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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통 속 절규사이를 오고 간 에드바르 뭉크

공공이 2022. 1. 14. 23:50

살면서 그리 많은 미술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뭉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절규>1893년작입니다. 

해골 같은 얼굴로 한 인간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장면의 이 작품에 보면 강렬한 붉은빛의 하늘이 더욱 그림 속 상황에 몰입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뭉크의 <절규>는 네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그중 세 번째 작품이 당시 한화 1300억 원에 판매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지위를 올렸다가.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작품이 도난당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뭉크라는 이름에는 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뭉크는 노르웨이 언어로는 '승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이름으로 보아 뭉크의 집안은 꽤나 종교를 꽤나 중시하는 집안이었음이 드러납니다. 

 

에드바르 뭉크의 유년시절로 잠시 돌아가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유는 작품처럼 그의 유년시절은 죽음과 지옥의 경험을 너무 빠르게 해 버렸었기 때문이지요. 에드바르 뭉크는 총 다섯 형제인데요. 금술 좋은 부모님과 형제들 사이에서 사랑받으며 커야 했지만 결핵으로 뭉크가 5살 되던 해에 모친의 사망으로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은 것도 잠시 뭉크가 13살이 되던 해에 뭉크의 큰 누나도 결핵으로 사망합니다. 그리고 동생 로이마저 광적인 신앙심으로 인해서 정신병을 얻게 됩니다. 가족을 잃는 슬픔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을 것이지만 온전히 그 환경을 받아 드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가 절대 없었을 텐데요 그래서 아마도 미술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의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나는 날마다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결핵과 정신병이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

 

뭉크가 처음부터 예술에 관심을 가질 순 없었습니다. 엔지니어가 되기로 했다가 입학까지 했으나 이후 다시 1879년 엔지니어 학교에 입학했다가 신속히 진로가 바뀌어 왕립 드로잉 아카데미에 입학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회화의 기초를 다진 뭉크는 1885년 프랑스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1886년 '병든 소녀'가 탄생하면서 어두웠던 내면을 화폭에 담아 내보입니다. 누나의 임종 직전의 모습을 담고 있고 뭉크가 애착을 갖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수많은 일들이 에드바르 뭉크에겐 어찌나 슬픔 영화일까요. 1889년 국비장학금을 받으며 레옹 보나 미술학교에 입학하면서 더욱 활동한 미술활동을 하게 된 에드바르 뭉크. 

기존의 기성세대 화가들에게는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는 꽤나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즈음 전 세계가 열광하게 된 작품 <절규>가 탄생됩니다.

 

이후에 에드바르 인생은 황금기였고 1902년 ‘삶의 프리즈(Frieze of Life)’ 연작 22점이 베를린 분리파 전시회에 출품되어 좋은 반응을 얻으며, 유럽 전역과 미국에서도 성공을 거뒀다. 결국 1908년 그는 노르웨이에서 전 세계 고국 미술을 전파한 공이 인정돼, 왕실훈장과 기사 작위를 수여받게 됩니다. 

 

이런 화려하고도 하늘 모르고 치솟았던 명성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녔던가 봅니다.  

우리에게 조차도 삶은 어려운 것들 투성이인데 그때마다 뭉크의 작품을 떠올리면 정말 이렇게 비극적일 수가 있단 말인가 온 몸으로 절규하는 소리가 닿을 것만 같은데 그림인 것을 그런데 뭉크는 절규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줍니다. 

 

 "해 질 녘, 친구 두 명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공포에 질려 다리 난간으로 다가갔다. 친구들은 무심히 걸었지만 나는 그 자리에서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가 느껴졌다. 그 순간, 자연을 관통하는 무한하고 강력한 비명이 들려왔다." 뭉크의 설명에 따르면 그림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건 인간이 아니라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이 지르는 비명에 화들짝 놀라 귀를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뭉크는 왜 친구들이 듣지 못한 자연의 비명을 혼자서만 듣고 괴로워했을까. 의학적으로 추측해보면, 뭉크는 공황장애를 앓았을 수 있다. 심각한 환청에 시달렸을 가능성도 있고, 망상에 쫓겨다녔을지도 모른다. 그런 질병을 앓는 사람들에게 '하늘이 뒤틀리는 공포'는 비유가 아니라 현실의 공포다. 뭉크는 낭만적인 붉은 노을마저 자연재해로 느낄 만큼 불안에 떨었던 인간이었다.

뭉크의 그림을 보면 공감과 불안, 공포를 현시대도 느끼는 것을 보면 그의 생각과 시대를 살아가는 데의 공포란 우리에게 멀리 있는 것이 아닌 가까이에서부터 시작되었을 때 공포와 불안은 더 깊게 파고들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죽음의 끝은 생전 그림으로 큰돈을 벌었다 해서 사라지진 않았습니다. 

어머니, 누나, 그리고 아버지, 남동생까지... 죽음으로부터 계속 노출되어 있는 거 같은 기분이라는 들었을 거 같습니다. 계속 그렇게 따라는 것이라고 에드바르 뭉크는 느꼈을 거 같습니다. 

1930년대 주변의 환경은 애석하게도 에드바르 뭉크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독일 나치 정권으로 인해서 탄압당하려던 것을 그림을 숨겨가며 작품을 지키는데 애썼습니다. 그리고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80세에 폐렴으로 눈을 감은 뭉크는 그렇게 아끼던 작품을 2만여 점이나 남기고 갔습니다. 뭉크의 집을 정리하던 사람들이 발견한 이 작품들은 역사적 환경 속에서도 예술을 사랑하고 본인의 그림을 아낌없는 가치를 봉인해 놓은 것처럼 발견한 이들로 하여금 안타까움 그리고 동시에 끝까지 놓고 싶지 않았던 살아 있음에 대한 증거이지 않았을까요?

 

우리는 참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을까라며 서로에게 생사의 인사를 건네고 있는 코로나 시대

죽음과 고통의 삶이 여러분들 힘들 게 할지라도 무너지지 않길 바라봅니다. 

이 그림이, 이 예술가의 삶이 당신에겐 그래도 빛이 되어줄 수 있길 또한 희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