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이보다 고통스러울까 멕시코 화가 프리다칼로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혹은 예술가들 중에 정말 빠지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슬픈 운명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어떤 말로도 그녀의 삶을 표현할 수 없고 오직 그녀가 남긴 작품이 지난 그녀의 삶을 오롯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1907년 헝가리계 독일인 사진사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서 태어난 멕시코 출생의 그녀는 출생 직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정체성은 추후 작품 <유모와 나>에 반영되어 확인됩니다.
그녀의 이름인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합니다. 그녀의 이름대로 평화로웠어야 할 삶인데 그렇진 않았습니다.
평화는 금세 금이 가서 6살 때 소아마비로 오른쪽 마비를 절었습니다. 성인이 돼서 사진을 찍을 땐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가릴 때가 많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화가의 꿈을 처음부터 가진 것은 아닙니다. 유난히 총명하고 똑똑했던 프리다 칼로는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컸는데요. 그에 철학, 음악, 미술, 고고학, 해부학 등..
프리다는 쾌활한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학창 시절 첫사랑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방과 후 남자 친구와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동차가 버스를 들이받는 큰 사고가 발생합니다.
무려 왼쪽 다리 11곳 골절, 골반, 쇄골 부러지고 부러진 손잡이가 배를 관통해서 생리불순과 불임에도 시달리게 하는 큰 사고였습니다. 사고 이후 무려 1년간 척추고정용 코르셋을 착용한 채 병원 생활을 지속했는데요 이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리다 칼로는 모딜리아니의 영향도 많이 받기도 했는데요 그녀의 자화상에 보면 진하고 길게 이어진 눈썹은 프리다의 특징이자 상징이기도 한데요. 슬프고 음울한 분위기의 자화상엔 그녀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움직일 수도 없는 그녀를 위해서 어머님 특수 이젤을 만들어 주었는데요 천장에 거울을 설치해서 스스로의 모습을 관찰하고 할 수 있는 계기로 이 과정에서 수많은 자화상을 남기게 되기도 했죠
"나는 혼자일 때가 많았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소재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세상 어느 누가 본인을 이렇게 까지 잘 안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요.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말이라면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집니다.
그렇게 그림을 그리던 도중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 줄 사람이 구합니다. 그가 바로 화가였던 디에고 리베라입니다. 멕시코 3대 화가이기도 했던 그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보며 '매우 독특하고 훌륭하며 빼어나다'라는 극찬을 받습니다. 그리고 만남 이후 사랑은 싹트게 됩니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의 나이는 21살 차이가 났습니다. 키도 크고 거구에 여자관계도 문란했기에 프리다 칼로 가족은 쉽게 그들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프리다 가족의 빚까지 갚아주며 결혼 허락을 받고 프리다 칼로는 결혼을 합니다. 이들의 결혼은 프리다 칼로의 작품으로도 남아 있습니다.
고통 속이 아닌 사랑하는 디에고의 삶의 반려자로 살길 원해서였는지 그녀는 작품 활동을 중단했지만 프리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디베라는 뉴욕에서 개인전을 제안받고 성공을 거두며 더욱 수많은 여성들에게 인기를 얻었지만 프리다 칼로의 외로움은 더해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디베라가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에 아이를 바라지만 임신에 성공했다가도 유산으로 아이를 유산하기를 여러 번 절망과 외로움 사이에 있던 그녀에게 사랑하는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이쯤에서 그녀의 삶이 평탄하길 바랬던 건 욕심이었을까요??
인생의 최악의 시기이자 가장 큰 상처로 남을 사건이 발생됩니다. 프리다를 보살피려고 와 있던 여동생이 디에고와 불륜을 저지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는데요. 너무나도 절망에 빠진 그는 집을 나오고 가장 고통스럽게 그린 작품이 탄생하게 됩니다. 아직도 생생한 작품에서의 고통은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웠을지 감히 짐작조차 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디에고와 이혼을 하게 되었고 이 시기에 그린 그림이 당시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의 눈에 띄어 전시를 열게 됩니다.
당시 그녀의 작품을 보고 많은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찬사를 보냈지만 정작 그녀 자신은 초현실주의가 아닌 현실이라는 부분을 강조하며 부정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예술계에서 주목받지만 다시 멕시코로 돌아온 그녀 다시 디에고를 만납니다. 왜라는 질문을 하고 싶지만 말론 설명할 수 없는 관계였을 거라 짐작합니다.
그리고 다시 척추통증이 재발하면서 큰 수술을 받고 이제는 더 이상 작품 활동이 힘들어진 그녀 세상 모든 고통이란 고통이 그녀에게는 유난히 휘몰아쳤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상하고 1953년 마지막 개인전을 엽니다. 그 전시는 멕시코를 비록 전 세계적으로도 화제가 되었고 그리고 1954년 마지막 작품 <비바 라 비다>를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준 예술가들의 삶이 고통스럽지 않았던 삶이란 찾기 힘들 정도로 고통은 작품으로 그 작품은 그들의 삶을 입증합니다.
혹시라도 살면서 고통스러운 순간이 온다며 프리다 칼로의 삶을 보며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계속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