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하는 공간/→ 공공이 :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17) 썸네일형 리스트형 만우절에 돌아오는 너무도 그리운 아름다운 당신 장국영 나는 여전히 그가 어디선가 살아 있을 거 같습니다. 나의 불안했던 청춘 틈을 메워 주었던 거짓말처럼 안녕을 말해주었던 나의 배우 장국영을 추억합니다. 1956년 9월 12일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났던 장국영은 10남매 중 막내였습니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을 거 같은 그였지만 행복한 추억보단 어릴 적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을 받기엔 충분하지 못했던 그 아버지는 사업으로 바빴고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던 그는 그 많던 형제들과도 친구들과도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버지 바람을 따르고자 13세 어린 나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1970년대 영국에서의 삶은 당시 폭발적 인기가 있던 데이비드 보위를 만나며 한층 더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혼으로 성장시켰고 훗날 데이비드 보위를 벤치마킹한 공연을 하기도 했.. 인간은 외로운 존재 그 외로움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 에드워드 호퍼는 뉴욕 태생으로 예술적 능력을 한껏 지지해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엔 뉴욕에서 일러스트레이션에서 순수미술로 전향하면서 미국의 대표적인 인상파 화가로서 이름을 알립니다. 에드워드 호퍼는 야수파, 입체파의 전위적인 발전엔 관심이 없었지만 드가나 마네등의 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영향을 받게 됩니다. 1910년 애드워트 호퍼는 그림으로 인정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요. 다양한 뉴욕에서의 그룹전을 시작으로 알리고 이후 예술가로서 저명한 위치에 서게 되고 뉴욕에서의 두 번째 전시는 모든 그림이 팔릴 정도로 큰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1923년 호퍼는 예술가 조세핀 베르스티유 니비 송과 결혼하게 되고 이후 그녀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됩니다. 이유는 그녀는 애드워드.. 1200억상당 최고 경매가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바스키아는 자유와 저항의 에너지로 점철된 새로운 예술작품을 통해 현대 시각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젊음의 대명사이자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장미셸 바스키아 1960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사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 언뜻보면 빈민가 출신이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전혀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모친은 틈나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갈만큼 예술에 조에가 깊었습니다.. 하지만 7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된 바스키아는 심한 방황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의 방황은 바스키아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길거리 소년으로 내몰고 맙니다. 다만 이 시절 알게된 친구와 .. 외계에서 온 찬란한 록스타이자 예술가 데이비드 보위 1960년대는 말 그대로 황금시대로 비틀스, 롤링스톤스가 히트곡을 내면서 밥딜런, 도어스, 비치보이스 등 어쩜 이리 같은 시기에 쏟아지던 뮤지션들이 영광스럽게도 너무나도 좋은 곡들을 내주어 황홀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데이비드 보위라는 록스타의 탄생은 우주가 축복해주었던게 아닐까 합리적 의심을 해봅니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인류 최초의 달 표현을 밟으며 닐 암스트롱이 한 말입니다. 인간이 달에 서는 순간을 숨 죽여 지켜봤을 그때 아폴로 11호를 생중게하며 배경음악으로 나오던 곡 가사속의 주인공은 우주비행사 톰 소령이였습니다. 지구로 귀환중에 교신이 끊기고 우주미아가 된다는 가사는 어쩌면 당시 상황과는 맞지 않았겠지만 아폴로는 11호는 무사 귀환을 했고 당시 .. 기발하고 광적인 천재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을 혹시라도 모른다면 다른 건 몰라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그의 날렵한 콧수염은 기억할 것이고 어릴 적 미술 시간이 보았던 작품 속에 녹아서 늘어진 듯한 시계가 있는 작품을 보면 기억이 날 것입니다. 1904년 태어난 그는 온전히 그의 삶으로 태어나진 못했습니다. 9개월 전 사망한 형의 환생이라 믿고 형의 이름을 그대로 아버지가 지어주셨기 때문에 어찌보면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가 변호사였던 그는 꽤나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달리의 부모님은 그가 바라는 것에는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첫 전시 스튜디오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그가 맘껏 예술에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넓혀진 주었기에 지금과 같은 괴짜이지만 천재적인 예술.. 땅 위를 디자인 하는 혁신적이고 역동적인 건축가 자하 하디드 서울 한복판에 우주선이라니 처음 DDP가 완공되기 전까지 혈세낭비라며 많은 질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적인 패션쇼와 연간 1000만명이 찾는 랜드마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DDP가 설계된 것일까요? 왜 우주선 모양이였을까요? 어떤 사람이 설계를 했던 걸까요? 1950년 이라크 바그바드 출생의 그녀는 영국에서 수학을 전공했고 영국건축학교 건축협회를 졸업한 뒤에 유명 건축가 렘 쿨하스 밑에서 일했다. 그리고 1979년 단독으로 건축사무소를 차리게 됩니다. 하지만 '여성 견축가' 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이기도 했고 성별을 떠나 이미 건축가들이 이미 서유럽, 미국 출신들이 많았기에 아랍계 건축가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1983년 그녀에게 기회가 옵니다 홍콩의 '피크 클럽.. 현실이 이보다 고통스러울까 멕시코 화가 프리다칼로 이 세상 많은 사람들 중 현실이 고통스럽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 혹은 예술가들 중에 정말 빠지지 않고 말할 수 있는 슬픈 운명의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 어떤 말로도 그녀의 삶을 표현할 수 없고 오직 그녀가 남긴 작품이 지난 그녀의 삶을 오롯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1907년 헝가리계 독일인 사진사 아버지와 스페인계 어머니 사이서 태어난 멕시코 출생의 그녀는 출생 직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 정체성은 추후 작품 에 반영되어 확인됩니다. 그녀의 이름인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합니다. 그녀의 이름대로 평화로웠어야 할 삶인데 그렇진 않았습니다. 평화는 금세 금이 가서 6살 때 소아마비로 오른쪽 마비를 절었습니다. 성인이 돼서 사진을 찍을 땐 왼쪽 다리로 오른쪽 다리를 가릴 때가 많았습니다. .. 죽음과 고통 속 절규사이를 오고 간 에드바르 뭉크 살면서 그리 많은 미술작품을 본 건 아니지만 뭉크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 1893년작입니다. 해골 같은 얼굴로 한 인간이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있는 장면의 이 작품에 보면 강렬한 붉은빛의 하늘이 더욱 그림 속 상황에 몰입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뭉크의 는 네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그중 세 번째 작품이 당시 한화 1300억 원에 판매되면서 세계에서 가장 비싼 작품으로 지위를 올렸다가. 너무 유명한 작품이라 작품이 도난당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1863년 12월 12일 노르웨이의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납니다. 뭉크라는 이름에는 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뭉크는 노르웨이 언어로는 '승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요 이름으로 보아 뭉크의 집안은 꽤나 종교를 꽤나 중시하는 집안이었음이.. 이전 1 2 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