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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공간/→ 공공이 :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기발하고 광적인 천재 20세기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을 혹시라도 모른다면 다른 건 몰라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그의 날렵한 콧수염은 기억할 것이고 어릴 적 미술 시간이 보았던 <기억의 지속> 작품 속에 녹아서 늘어진 듯한 시계가 있는 작품을 보면 기억이 날 것입니다. 

1904년 태어난 그는 온전히 그의 삶으로 태어나진 못했습니다. 9개월 전 사망한 형의 환생이라 믿고 형의 이름을 그대로 아버지가 지어주셨기 때문에 어찌보면 범상치 않은 그의 삶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아버지가 변호사였던 그는 꽤나 유복한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달리의 부모님은 그가 바라는 것에는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첫 전시 스튜디오를 제공해주기도 하고 어린 나이에 그가 맘껏 예술에 바라보는 시각 자체를 넓혀진 주었기에 지금과 같은 괴짜이지만 천재적인 예술가의 탄생이 가능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17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아버진 어머니의 동생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물론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과는 다르게 마찰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마드리드의 미술학교를 다니면서 이탈리의 미래파와 프랑스의 입체파 화가들에게 영감을 받아서 그림을 그렸는데요. 당시 스페인에선 드문 화풍이였기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학교를 다니면서도 특출 난 학생이던 달리는 반정부활동을 하다가 학교도 퇴학당하고 그 시점에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있던 파리로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있었습니다. 당시 초현실주의 사조 창시자이자 시인인 앙드레 브르통은 신비한 이미지를 그리는 달리에게 손을 내민다. 1929년 달리는 초현실주의 클럽에 가입했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앙드레 브르통과 마찰로 나오게 되기도 합니다. 

달리의 작품 속에 꿈의 세계로 안내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입니다. 달리는 프로이트 저서 '꿈의 해석'을 탐독해는데요. 프로이트는 정신적 문제를 겪는 환자의 꿈을 분석했습니다. 무의식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파악해 치료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프로이트의 영향력은 막대했고 초현실주의도 프로이트의 무의식 연구를 기반 삼아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달리가 프로이트를 추종한 이유는 개인적이었습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형의 이름으로 살아왔던 삶에서 오는 트라우마였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면서도 깊은 곳에 남아있던 형의 존재가 달리의 삶에선 떨쳐버릴 수 없는 것 중 하나였기에 더욱 꿈을 그리며 꿈의 세계에 빠져든 것입니다.

 

조현실적인 작품 세계에도 그의 그림엔 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림의 흐름들이 보입니다. <기억의 지속>에 해안가의 풍경이지만 햇살이 비추는 부분, 물이 닿는 부분 등 디테일한 표현은 말할 수 없이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아고 있는 무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의 욕구와 진실성에 있다고 봅니다. 내면 깊숙하게 자리 잡은 것을 표현하는 게 초현실주의 목표였다면 살바도르 달리가 그것을 너무나도 잘 표현해줬기에 지금의 그가 있다고 봅니다. 

 

달리는 자의식이 강한 화가였습니다. 그림만큼이나 기행으로도 유명했을 정도니까요. 30대 그의 자서전에서 스스로를 천재라고 말했지요. 현재는 말하지 않아도 그를 천재로 불리지만 당시는 센세이션 했습니다. 또한 달리의 사랑에 대한 일화도 굉장히 유명합니다. 달리와 어울린 초현실주의 예술가 중엔 시인 폴 엘뤼아르가 있습니다. 달리는 엘뤼아르의 부인 갈라에게 반했고 공격적으로 구애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달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불륜 당사자가 되는 걸 반대 했습니다. 제가 부모님이었다 해도 그럴 법도 합니다. 달리는 아버지와 인연을 끊고 갈라에게 올인합니다. 그리고 갈라는 엘뤼아르와 찢어지고 달리와 결혼을 합니다. 달리는 "내 어머니보다, 내 아버지보다, 피카소보다, 그리고 심지어 돈보다 갈라를 더욱 사랑한다. 그녀가 나를 치유했다"라고 말했고 불륜으로 시작한 관계였지만 달리는 죽을 때까지 갈라만을 바라봤습니다. 

 

2차 대전 이후 꽤 오래 미국에 머물렀는데, 이 기간 여러 분야 예술가와 어울렸습니다. 영화, 사진, 연극, 패션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했다. 월트 디즈니와 알앨프리드 히치콕과도 협업한 달리는 슈퍼스타 대우를 받았다. 달리는 기업 로고를 그려주고, 광고에 얼굴을 내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아는 추파춥스의 유명한 로고도 달리 작품입니다.

예술과 상업 경계를 무너뜨린 그는 팝아트 탄생 기반을 마련했던 달리는 성공한 예술가, 스타, 연예인 지위를 오래 누렸고 1982년 갈라가 8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급격히 쇠락했습니다. 심한 중풍에 시달렸고 정신적 문제도 생겼다. 1989년 달리는 갈라 곁으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