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록하는 공간/→ 공공이 :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1200억상당 최고 경매가 작품을 남긴 천재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나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바스키아는 자유와 저항의 에너지로 점철된 새로운 예술작품을 통해 현대 시각 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됩니다. 지금까지도 젊음의 대명사이자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는 장미셸 바스키아 

1960년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사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그, 언뜻보면 빈민가 출신이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전혀 그의 아버지는 회계사였고 모친은 틈나면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전시회를 갈만큼 예술에 조에가 깊었습니다.. 하지만 7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떨어져 살게 된 바스키아는 심한 방황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의 방황은 바스키아가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길거리 소년으로 내몰고 맙니다. 다만 이 시절 알게된 친구와 그라피티 화가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집을 나와 노숙하며 우편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당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클럽 57과 머드 클럽에서 활동하면서 영화제작자, 음악가이자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Diego Cortez)를 만난다. 바스키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는 그의 작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1980년 제니 홀저, 케니 샤프, 키키 스미스 등이 참여한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즈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미국 화단에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19명의 미술가가 1,600점 이상을 출품한 《뉴욕-뉴 웨이브》 전시에 바스키아는 자동차, 비행기, 도식적인 해골,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공존하면서도, 어린아이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작품 15점을 출품하게 됩니다.

 

 

단 여기서 주목할 것이 왜 해부학적 인체 형상을 그리게 되었을까요??

 

바스키아는 1968년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내장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비장을 떼어내는 큰 수술로 장기간 병원에 있게 된 바스키아에게 어머니는 해부학 입문서인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을 선물 했습니다.

입원 기간 바스키아는 이 책을 통해 인체의 구조와 해부학적 지식을 처음으로 습득한다. 바스키아는 작가로 거듭난 이후에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보며 끊임없이 연구했고, 이는 그의 내면에 자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결합하여 작업에서 중요한 요소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잘 알려진 장미쉘 바스키아와 앤디 워홀 두 예술가의 만남 그 만남 마저 화제였던 두 사람의 일화는 이렇습니다.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소개로 바스키아가 그토록 바랐던 앤디 워홀(Andy Warhol) 과의 만남이 이루어졌습니다. 비쇼프버거의 권유로 워홀은 바스키아의 초상화를 제작했으며 바스키아 또한 워홀과 자신의 인물화를 그리게 되는데요. 이후 워홀은 바스키아가 자신의 뒤를 잇는 새로운 미술계의 별이 될 것임을 감지하고 적극적으로 함께 활동하게 됩니다.

1983년 바스키아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 워홀과 협업한 전시를 개최합니다. 그러나 이 전시와 1985년 워홀과 함께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을 받으면

서 워홀과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리고 지속적으로 흑인 영웅들을 그려왔던 바스키아는 1986년 단순한 관심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찰로써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공화국(République of Côte d’Ivoire)에서의 전시를 개최합니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고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로 이주할 결심을 했지만

바스키아는 코트디부아르 아비장으로의 이주를 엿새 앞둔 8월 12일 마약 남용으로 유명을 달리합니다. 

 

 

바스키아를 떠올리면 검은 피카소 불리우며 다양한 색채와 작품 속 중심에 서서 내미한 모습까지 봐달라는 뜻으로 작품을 보는 이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거 같습니다. 

유명을 달리하고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끊임없이 알려주고 있습니다. 2017년 미술품 경매회사 소더비가 지난 18일 미국 뉴욕에서 한 ‘전후 현대미술품’ 경매에서 바스키아의 1982년작 회화 ‘무제’(사진)가 치열한 응찰 경합 끝에 1억1050만달러(약 1248억원)에 낙찰됐습니다. 무려 1200억이 넘는 금액, 역대 미술품 경매 사상 여섯 번째로 높은 낙찰가로 이전 미술품 경매 최고가는 201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억7936만달러(약 2000억원)에 팔린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리의 여인들’이였습니다. 
바스키아의 1982년 '무제'는 1억달러를 넘어선 그의 첫 작품이였고 팝 아티스트 앤디 워홀의 ‘실버 카 크래시’(1억500만달러)를 뛰어넘어 미국 작가 최고가 기록도 갈아치울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낙찰자는 일본 대표 온라인 쇼핑몰 조조타운 설립자인 마에자와 유사쿠(41)로 밝혀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