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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공간/→ 공공이 :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꿈을 향해 레디고 한국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여러분은 꿈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사전적 의미로는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보통 꿈이라고 하지요?

그럼 실현하기까지 꿈이란 것을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기 그 꿈을 하나로 열정을 다했던 감독이 있습니다. 

 

2017년  영화감독 박남옥의 자서전엔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힘들었지만, 눈물이 나도록 그 당시기 그립습니다."

이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로 당시 무수히 많은 일들을 겪어내야 했던 당시 영화계를 견뎌낸 영화감독 박남옥

 

1923년 대구에서 식구 많은 부잣집 셋째 딸로 태어납니다. 

영화감독 이전에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운동 중에서도 투포환선수로 한국 신기록을 가진 선수였고 단거리, 높이뛰기 등 운동에 다분한 소질을 보였습니다.

 

아쉽게도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이화여전 가정과에 입학하고 시집가라는 부모님 말에 1년 만에 자퇴를 하고.. 신문사 기자로 영화평을 썼고 당시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국방주에 촬영부에 들어갔다가 극작가 이보라를 만나 결혼합니다. 이렇게 남편이 쓴 시나리오로 찍은 영화가 그녀의 작품 <미망인>입니다.

 

영화&amp;lt;미망인&amp;gt;의 원제목은 과부의 눈물이였다고하니다.&amp;nbsp;

 

당시엔 여성이 영화감독이 된다는 것에 호의적이지 못해서 선뜻 투자자들이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박남옥의 언니에게 제작비를 빌려서 찍었고 그래서 영화 제작사 이름도 '자매 프로덕션'이였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곳저곳을 들리며 제작비를 충당하고 어린 딸을 맡길 곳이 없어 함께 촬영장을 누볐고

식비를 아끼려고 스태프를 위해서 새벽에 직접 장을 봐서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적처럼 촬영은 끝났지만 당시를 회상한 영화감독 박남옥이 남긴 말이 있습니다. 

"출산보다 힘들었다"

 

그렇게 힘들게 찍은 <미망인>은 처음이자 마지막 영화로 개봉 나흘 만에 극장에서 내려졌고 그렇게나 고생하였지만 

기회가 다시 주어지진 못했습니다. 

오랜시간을 꿈을 향해 달려온 그녀에게도 높은 벽 앞에선 최초라는 타이틀이 너무 무거웠기에 더는 그녀의 영화를 볼 순 없었지만 이후 1997년 제1회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미망인>이 틀어지면서 다시 재조명받았습니다.

 

 

60여 년 전 미망인들을 미심쩍은 시선으로 바라볼 때 영화는 그들의 인생을 과감 없이 부딪히는 모습을 담아 추후 재조명된 것이 어쩌면 당연하게 보입니다.

 

훗날 후배 여성 영화인에게 힘을 보태며 사비로 상금을 내놓았고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영화를 만든 임순례 감독이 수상했습니다. 지금의 많은 여성 감독들이 길을 가는 것이 주저하지 않도록 또한 많은 지원을 아까지 않은 그녀의 뜻에 지금은 수많은 영화감독들의 잇고 있어서 다행입니다.

 

살아가면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괜스레 걱정하는 마음을 담아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합니다

"그건 꿈일 뿐이야, 그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살겠어?

"좋아한다고 다할 수는 없는 거야, 그건 네가 아니어도 할 사람들 많아"

 

내가 그 길을 , 그 꿈을 꾼다고 해서 어쩌면 난 주목받을 일도 다시 그 꿈이 좌절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꿈을 꾸는 순간만큼 아이를 업고 발로 뛴 현장을 아울렀던 영화감독 박남옥처럼 심장 뛰는 일이 있을까요?

당신의 심장이 한 번쯤 뛰길 영화감독 박남옥 감독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그 꿈을 응원하고 싶습니다. 

 

오늘, 내일, 먼 훗날의 그 꿈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