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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공간/→ 공공이 :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성룡의 롤모델로 알려진 흑백 무성영화 감독이자 배우였던 버스터 키튼

 

누구든 삶 속에서 수없이 넘어지고, 깨지고, 다치고 심지어 누군가에게 조롱당하기도 합니다. 

그럼 순간에 어느 누가 표정이 일그러지지 않을 수 있을까?

좌절하고, 슬프고, 분노하고 갖은 감정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찌 멀쩡할 수 있을까?

그런 소용돌이 오래 전에 감췄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게 바로 버스터 키튼입니다. 

어쩌면 버스터 키튼은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가려진 표정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1895년 미국 캔사스주에서 배우였던 부모님 아래서 자연스럽게 영화로 흡수되었고 

찰리 채플린과 함께 무성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배우인 버스터 키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위대한 무표정의 감독을 기억해 주었으면 합니다. 

 

무성영화에서도 극과 극 찰리 채플린처럼 익살스러운 연기로 사랑받았다면 

버스터 키튼은 엄청난 스턴트와 슬랩스틱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작고 왜소한 남자의 아슬아슬한 기적 같은 연기는 영화<제너럴>에서도 유감없이 나와 있었다. 

실제 일어났던 사고를 기초로 만들었던 블록버스터급 영화였지만 당시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버스터 키튼 자신은 무척이나 좋아한 영화로 알려져 있다 

좋아할 이유는 많겠지만 한 컷, 한 컷 공들인 티가 났고 기관사 역할을 했던

그가 기차를 오고 가는 아슬아슬한 맨 몸 연기 그가 지금까지 기억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버스터 키튼이 위대한 표정의 영화감독/배우로 기억된다 하더라도 지울 수 없던 것

앞서 막대한 블록버스터급의 영화가 유성영화들이 고개를 들면서 여러 가지 사유 및 영화사와의 불화로 

버스터 키튼을 해고한 것입니다. 

 

영화에서는 넘어져도 금방 일어나서 툭툭 털고 일어날 거 같은 그였지만

1930년대까지 그는 감독과 배우대신 코미디 작가로 근근이 생활해야 했고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쓴 맛을 보기도 했다. 

 

그러던 중 1950년대 버스터 키튼의 삶을 조명하던 붐이 일어나면서 

1960년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고 많은 영화계 관계자들의 기립박수를 받게 된다

그리고 그 박수에 그가 남긴 한 마디

"30년이 넘어서야 뒤늦게 찾아온 영광이군요. 박수 소리는 근사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그리고 공로상을 받은 다음 해 버스터 키튼은 눈을 감았습니다. 

 

이런 그를 추모하고 잊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무표정을 기억합니다. 

세상 쓸쓸하고 감춰진 그의 무표정을..

혹시라도 그가 살아 있다면 그가 남겼던 그 한 마디처럼 너무 늦게라도 이젠 다양한 표정 속에서

삶을 살아갔다면 어땠을까라는 아쉬움을 남겨봅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다소 무표정일 때가 많은 자신을 발견하는 때가 온다면

버스터 키튼을 기억했다가 그를 떠올려 주시고 

당신의 무표정을 많은 다양한 표정들로 살아있음을 지켜 내시길 바랍니다.